[relay interview]
우리들의 시골살이 이야기
찐 시골 생활 8년 차,
시골 초등학교의 인기 만점 선생님 예준 씨를 만나다.
신지원,제리
[relay interview]
우리들의 시골살이 이야기
찐 시골 생활 8년 차, 시골 초등학교의 인기 만점 선생님 예준 씨를 만나다.
신지원, 제리
우리들의 시골살이 이야기 네 번째 주인공으로 아이들과 사랑에 빠진,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 송예준 씨를 만났다.
'도시에서 온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 듣자마자 영화 몇 편이 생각났다. <내 마음의 풍금>에서의 자상하고 상냥한 선생님이 떠오르기도 하고, <선생 김봉두>의 적응하느라 애를 먹는 깍쟁이 도시 선생님이 생각나기도 했다. 우리가 만난 예준 씨는? 두 영화를 절묘하게 섞어둔 것 같았다! 짓궂은 아이들 덕분에 애를 먹긴 하지만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만나서 반가워요!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죽곡초등학교에서 이제 햇수로 8년, 8년째 죽곡초 교사로 불리고 있는 송예준입니다. 8년 동안 군대에서 2년, 파견직으로 2년 정도 외부에 있긴 했지만 그래도 제 소속은 8년 전부터 지금까지 쭉 죽곡초였습니다. 아무래도 곡성에서의 삶에서는 죽곡초 교사가 제일 커요. 곡성에 처음 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이니까요.
그러면 죽곡초에 관해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네요. 어떤 학교인가요?
죽곡초는 일단 곡성 사람이라면 다 알다시피 곡성에서 제일 시골 학교라고 할 수 있어요. 제일 골짜기에 있거든요. 대신 멀고 외진 곳에 있는 만큼 더 아름다운 학교라고 저는 늘 그렇게 이야기하고 다닙니다.
죽곡초만의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을까요?
풍경이야 어느 학교든 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요. 죽곡초는 처음 왔을 때, 제가 그때 담당했던 업무로 인해 아이들의 개인 사정을 좀 알 수 있었거든요. 우리가 흔히 아는 일반 학교에서 봤을 때 이런저런 사유가 있는 친구들이 많지는 않잖아요. 환경적인 부분 때문에 그런지 아이들이 더 순수하고, 선생님들도 그런 순수한 아이들을 어떻게 더 잘 교육할지 고민하고, 그 고민의 결과를 이룰 수 있는 교육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예준 씨의 학교생활은 어떤가요?
우리 학교는 전교생이 38명이고, 제가 그중에 3분의 1을 맡고 있습니다. 여기서 3분의 1이라 하면 12명이에요. 거기서 2학년 담임을 맡고 있어요. 우리 학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한 반씩 있어서 6학급 학교라고 불려요. 전교생이 적다 보니까 분교인 줄 아시는 분도 있는데요. 분교는, 예를 들면 섬에 있는 학교 같은 경우에 큰 학교 소속 학교여서 a 학교의 분교 이런 시스템인데 우리는 분교가 아니라 당당하게 독립적인 초등학교랍니다.
아이들과의 관계가 더 돈독할 수밖에 없겠어요.
맨날 복도에서 뛰다가 저한테 혼나는 친구들도 있고요. 6학년쯤 되면 장난도 많이 치는데 최근에 야구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를 놀리기도 하고. (웃음) 아이들이 특별히 자기 반 담임이 아니더라도 허물없이 잘 다가와요. 저 같은 경우에는 특히나 그런 구분을 잘 안 두는 편이라서 지금 6학년 친구들을 저 파견 가기 전에 1학년, 2학년이었을 때 만났는데도 지금까지 친하게 잘 지내요. 저희 반 친구들뿐만 아니라 그 친구들 형, 누나들도 잘 아는 편이죠.
도시 학교에서도 근무하셨다고 들었어요. 시골 학교 아이들과 차이점이 있나요?
경기도 부천에 있는 학교에서 근무했었어요. 사실 애들은 다 똑같아요. 굳이 차이점을 얘기하자면, 저희 반 애들이 요새 빠진 거는 자꾸 벌레를 잡아 와요. 직접 키우겠다고. 제가 막고 또 막아서 교실 안으로 들이는 거는 막았지만, 지금 교실 밖 복도 신발장 위에 있는 곤충 채집함 속에 다양한 벌레들이 살고 있어요. 그리고 최근에 저희가 텃밭 활동을 하면서 식물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이 돼서 얘들아 식물 뭐 살까 했더니 파리지옥을 사고 싶대요. 파리지옥을 사서 자기들이 키우는 벌레들을 주더라고요. 그럴 거면 왜 키우나. 또 학교 정문에 벤치가 하나 있는데 의자 위에 저희 반 아이들이 키우고 있는 각종 수중 생물들, 수구개나 이런 친구들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키우는 파리지옥🪴
도시 학교와 비교했을 때 시골 학교만의 장점도 있을까요?
시골 학교의 가장 큰 특징은 교사 한 명당 담당하는 학생 수가 적어서 n 분의 1의 파이가 크다는 거예요. 우리 초등학교 때를 생각해 보면 한 반에 40명씩 있어서 담임 선생님이랑 대화 한 번 안 해보고 지나가는 날들이 많거든요. 여기는 누구든 선생님이랑 대화를 나누고 소통하는 시간이 아주 많아요. 예전에 맡았던 친구들은 그게 되레 익숙하지 않아 오히려 교사와 소통하기보다는 숨으려고 하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그 부분에서 적응시키는 데 다소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지만, 그 부분이 시골 학교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이라는 게 물론 아이들의 요구를 전부 들어주는 것만이 아니지만 최대한 그것을 반영해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 그것도 되게 중요한 부분이잖아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 도시의 더 많은 학생 수, 더 많은 학급에 비하면 유리하죠. 조금 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그걸 더 반영할 수 있고, 선생님의 시선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조금 더 바라볼 수 있고요. 그런 부분이 가능해서 계획을 실제로 실천해 나갈 수 있는 부분이 많아요. 같이 만들어갈 수 있는 교육적 환경이 갖춰져 있다, 정도로 얘기할 수 있겠네요.
그만큼 힘든 점도 있겠죠?
솔직히 말하면 업무는 정말 힘들어요. 학교라는 기관은 아무리 그 규모가 크든 작든 하나의 기관이에요. 근데 큰 도시에 선생님이 100명 있는 학교나 우리 학교처럼 선생님이 몇 안 되는 학교나 해야 하는 최소한의 업무량은 똑같아요. 물론 큰 학교가 최소한의 업무에 살이 조금 더 붙었으니까 일이 조금 더 많지만 나눠서 하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러니까 한 명당 해야 할 일은 작은 학교가 훨씬 커요. 다른 학교에서는 담임과 부장이 나뉘어 있다면 우리는 교사 한 명 한 명이 실제 부장은 아니더라도 부장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것이 곧 실천이 되는 거예요. 이를테면 우리가 체험학습을 간다고 하면 제가 부천에 있을 때는 그냥 부장님이 우리 부장 회의에서 이렇게 정해졌다, 하시면 거기에 맞춰서 우리 학년에서 또 회의를 나누는 건데 우리는 우리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면 이게 현실화가 되는 거예요. 자연스레 책임감도 요구되고 조금 더 아이들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죠.
예준 씨도 도시에서 나고 자랐잖아요. 곡성의 작은 학교로 오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저는 도시에서 학교를 나왔어요. 도시에서 나고 자랐고. 사실 파견 갔던 도시 학교의 형태가 더 익숙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대학교 3학년 때 실습을 갔었어요. 요새 초등학교에서도 교실 붕괴 현장이 많잖아요. 제가 실습 갔던 반이 그랬거든요. 선생님은 그저 교과서만 읽고 있고 아이들은 듣지 않고. 그 반에 힘든 학생들이 많았어요. 그 학년에 남자 선생님이 그분밖에 없었고 그분이 학년 부장을 맡으면서 동시에 그 힘든 애들을 다 맡고 있더라고요. 뭔가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들더라고요. 물론 그분이 승진을 생각해서 그랬었는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요. 그분이 웃는 모습을 직원 체육대회 할 때 딱 한 번 봤거든요.
솔직히 말해서 무서웠어요. 저는 교대를 고민하고 가지 않았거든요. 그때는 사명감이 있어서 간 것도 아니어서 무섭더라고요. 교사는 누군가의 인생을 책임지고 영향을 끼치잖아요. 누군가의 인격 형성에, 누군가의 삶의 가치관에. 특히 아이들에게 있어서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는데 그때 정말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교사로서 내가 맞을까. 고민을 하다가 내린 결론은 그렇다면 차라리 한적한 시골로 가보자.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교사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곡성으로 오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다인수 학급보다는 소인수 학급이 있는 곳으로 한 번 가보자, 라는 마음에 전남으로 시험을 쳤어요. 사실 곡성이라는 곳도 잘 몰랐고 외갓집이 전남이라서 그냥 외갓집으로 갈까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가벼운 생각이었죠. 살면서 들어본 적도 없는 곡성이라는 지역에 발령을 받은 거예요. 심지어 외갓집은 곡성도 아니고 장흥이거든요. 사실 전 장흥의 정확한 위치도 잘 몰랐었어요. 20대의 패기였죠. 그렇게 25살에 곡성에 오게 됐어요.
처음에 곡성에 왔을 때 느낌은 어땠어요?
2014년도 8월 말이었는데 그때 비가 엄청 내렸어요. 그 당시에 많은 지역이 비로 잠기고 그랬어요. 폭우 속에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나의 미래인가’ 하는 암울함이 컸는데 다행히도 그게 약간 액땜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음 학교에 가서 근무했을 때 너무나도 좋았어요.
어떤 점들이 좋았나요?
선생님들이 정말 좋았고요, 아이들도 너무 좋았어요. 그때 과학을 전담해 3, 4, 5, 6학년을 다 가르쳤는데 그때 가르쳤던 애들이 벌써 성인이에요. 성인이 돼서 술을 사주기로 했는데 언제 만날지는 모르겠네요. 저도 어렸을 때 왔기 때문에 우리 학교에 대해 고향 집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처음 근무했던 시간이 너무나도 좋았고 강렬했기 때문에 저는 군대 갔다 와서도 당연히 죽곡초로 갈 것을 생각했어요. 도시 파견 기간이 끝나고 죽곡초로 못 갈 수도 있었는데 저는 1순위가 항상 죽곡초로 다시 돌아가는 거였어요. 사실 처음 6개월은 체험판이라고 생각하고 도시로 파견 가기 전을 시즌 1, 지금은 시즌 2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곡성 생활 시즌 1과 시즌 2의 차이점이 있을까요?
시즌 1에서 되게 재밌었던 게 같은 학년을 3년을 맡았어요. 군대 가기 전에 어떤 아이 한 명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되게 스스럼없이 다가왔거든요. 그래서 그 아이의 담임이 한번 돼 보고 싶다 했는데 우연히도 군대 갔다 와서 그 아이의 담임이 됐고 그렇게 담임을 맡기 시작해서 3년을 같은 담임을 했거든요. 사실 군대 가기 전에는 조직에 대한 깊은 성찰, 고찰은 별로 없었고 그저 학교생활이 재밌었어요. 제대해서는 조금씩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저도 그만큼 나이가 들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교사로서의 확신은 없었어요.
아이언맨 시리즈를 보면 1편에서는 되게 짜잔 하고 화려하게 등장하잖아요. 하지만 아이언맨도 2편에서는 고뇌를 합니다. 아이언맨으로서 자신에 대해서 고뇌를 하다가 3편에서 짜잔 하고 딱 완성형으로 나타나거든요.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애들이 4학년 때 군대 마치고 짜잔 하고 나타나서 즐겁게 생활을 하다가 5학년 담임도 맡게 됐을 때 내가 이 아이를 연임하는데, 나는 지금 교사로서 나 자신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 '아이들한테 해가 되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이 정말 컸어요. 2년쯤 맡으니까 졸업은 시키고 싶더라고요. 3년째 맡았을 때 그때 '아 나는 교사가 정말 잘 맞는 사람이구나' 그걸 조금 깨달았어요. 지금은 제가 교사라는 직업이 저한테 천직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죽곡초가 없었더라면 '과연 내가 아직까지 교사로 있었을까?' 라는 질문에 저는 확신이 없어요.
자, 그러면 선생님말고 인간 송예준에 대해 들어볼까요? 지금은 어디 살고 있나요?
곡성에 내려온 이래로 쭉 혼자 살고 있습니다. 읍내에서도 살고, 학교 인근에서도 살고, 관사에서도 살고. 현재는 관사에서 살고 있습니다.
인간 송예준으로서 곡성에 살기는 어때요?
참 재밌는 거는 이 곡성군 내에서도 읍에서 살 때와 관사에서 살 때 혹은 죽곡면에서 살 때가 차이가 커요. 삶의 질이 좀 달라요. 물론 지금은 관사이기 때문에 죽곡면에서 살긴 하는데, 사실 읍에서 살 때가 더 좋았던 것 같아요. 곡성에 온 지 오래되다 보니까 곡성 내에 저의 네트워크가 있잖아요. 그 네트워크가 읍에 있을 때는 조금 더 만나기도 편하고 인간관계가 더 넓게 형성됐었는데 지금은 관사에 있다 보니까 읍까지 차로만 30분이 걸려요. 차가 없던 시절에는 본가에 갔다 오려면 오후 2시에 기차를 타고 들어와야 했어요. 안 그러면 죽곡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탈 수가 없거든요.
제일 큰 건 교통인 것 같아요. 교통 인프라가 부족하니까 술을 자주 마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들 만나서 술 한잔하려고 하면 어렵죠. 읍에 살 때는 그런 부담이 없었는데 관사나 죽곡에 살 때는 아예 꿈도 못 꾸는 부분이에요. 그 부분이 제일 큰 것 같아요. 광주 한 번을 가도 이제 훨씬 더 멀어지니까 죽곡에서.
심심해서 고마운 부분도 있어요. 덕분에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 심심함을 채우기 위해서. 퇴근하고 관사에 있으면 정말 하루가 길거든요. 긴 하루를 무의미하게 누워서 보내고 싶지 않아서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어떤 운동을 하시나요?
평일에는 읍에 나와서 복싱을 하러 다녀요. 복싱을 안 가는 날에는 죽곡에서 러닝을 하거나 아니면 주말이나 여유 시간이 있을 때는 곡성읍에 나가서 등산을 하기도 합니다.
곡성에 복싱장이 있군요. 복싱은 어때요? 재밌나요?
학교 선생님들이랑 같이 다니고 있어요. 같이 운동하면 재밌어요. 혼자 하는 것보다는. 나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등산은 혼자 가는 때도 있는데 복싱은 같이해서 재밌어요.
운동하는 거 이외에 곡성에서 취미 생활은 어떤 게 있나요?
사람들을 만나요. 사람들 만나는 거 외에는 솔직히 말해서 취미를 즐기기에 환경이 다소 열악한 부분이 있거든요.
어떤 사람들을 만나세요?
친하게 지냈던 동료 교사도 있고, 일하다가 알게 된 사람들도 있어요. 주로 만나서 같이 밥 먹고 이야기 나누고 볼링을 쳐요. 놀러 가기도 하고 여행도 같이 가고요. 곡성에 정말 몇 없는 문화시설을 알차게 누리는 메이트들이에요. 놀이 메이트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곡성에는 문화시설이 없는 편인가 봐요.
영화관이 최근에 재개장했고요. 작은 영화관이라고 해요. 볼링장도 있고, 기차 마을도 있고, 카페가 많죠. 사람들 만나기에는 충분해요.
곡성에 8년이나 살았지만, 그래도 이건 익숙해지지 않는다 하는 것도 있을까요?
교통편이겠죠. 저는 가족들이 경기도 부천에 살아서 서울 가는 버스를 한 번씩 이용했는데 그게 하루에 한 편이 있었어요. 그마저도 이번 2월 말에 올라가려고 하니까 없어졌더라고요. 그래서 부랴부랴 기차를 타고 올라갔던 경험이 있어요. 이게 물론 수익성이라는 부분도 있겠지만 광주에서 곡성으로 들어오는 버스도 밤 9시면 끊기거든요. 차편이 없으니까 안 살고, 안 사니까 또 없어지고. 약간 계속 악순환을 초래하고 있어요.
조금 비용을 들여서라도 군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교통편이 해결된다면 사람들이 잘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게 마을과 비슷하거든요. 마을에 누군가가 귀농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특히 아이들이 있는 가족이 귀농할 때 제일 먼저 보는 게 학교예요. 학교가 있냐 없냐. 그래서 요새 마을에서 학교를 지키려고 하는 노력이 아주 많은데 교통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곡성과 인접한 도시에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충분한 교통편이 있냐가 젊은 사람들이 곡성에서 살아볼까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큰 요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더군다나 지방에 살다가 수도권에 가서 생활했을 때 포기하지 못하는 것 중의 하나가 그런 발달된 대중교통 시스템이라고 하더라고요.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군에서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면 좋겠어요.
불편한 점도 있지만, 그래도 이게 시골살이의 매력이다 하는 것도 있을까요?
별이 아주 잘 보입니다. 교과서에서 봤던 별들을 곡성 내려와서 다 봤어요. 별로 대표되는 자연환경 있죠. 이를테면 미세먼지만 해도 미세먼지 수치가 나쁜 날이 손에 꼽거든요. 근데 부천에 있을 때는 정말 나쁜 날이 많았어요. 이런 부분들은 없어서 진짜 좋아요.
그리고 그 외에는 문화적인 부분인데 저한테는 이게 정말 크거든요. 도시에 있으면 뭐든지 돈으로 귀결되는 게 커요. 대화의 양상도 집값이 어쩌느니 명품이 어쩌느니 이런 얘기들을 많이 나눴어요. 물론 저도 돈 좋아합니다.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부분이죠. 돈이 많으면 분명히 편하죠. 근데 딱 거기까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수단으로서의 본질이 중요한 거지 목적으로서의 본질이 돼서는 안 되는데 그런 부분이 지치더라고요. 내가 내 가치관을 지키며 살기에는 그런 분위기가 저를 조금 조바심 나게 하기도 하고, 그래서 곡성을 떠나있을 때 더더욱 돌아오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물론 여기서도 돈과 관련해 민감한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그런 부분에서 다소 자유로워요.
확실히 도시에서 맺는 인간관계랑은 차이가 있나 봐요.
아무래도 여기는 사람이 별로 없다 보니까 한 번 맺어진 인간관계가 좀 끈끈합니다. 한 번 맺어지면 유대감도 강하고, 상대방을 더 챙기게 되고 상대방도 저를 더 챙기게 되는 경향이 있어요. 물론 군중 속에 있을 때도 좋지만 군중 속에서도 고독을 느끼잖아요. 그런 부분에서는 저는 사람이 적더라도 확실한 관계가 더 좋은 편이라서 유대감 있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환경이 좋아요. 100명이 있는데 친해지는 것보다 한두 명 있는데 친해지는 게 끈끈하잖아요. 100명 중의 한 명 보다 두 명 중에 두 명이 나은 것 같아요.
혹시 귀촌을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귀촌 선배로서.
귀촌에 대해서 고민하시는 분들은 보통 크게 세 분인 것 같아요. 퇴직하시고 연세가 있으신 분들, 혹은 아이들 교육 때문에 고민하시는 분도 있고, 새로운 대안적인 삶을 추구하는 젊은 청년들이겠죠.
아이들 교육 때문에 고민하시는 분들에게는 일단은 생각보다 생각했던 것과 다를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이상을 꿈꾸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확실히 도시와 다르긴 달라요.
대안적인 삶을 추구하는 청년들에게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말을 하고 싶어요. 살다 보면 맞춰야 하는 것과 흔들어야 하는 것들이 있거든요. 사실 시골은 굉장히 보수적이라고 하잖아요. 어떤 부분에서 깨뜨려야 되는 부분이 있기는 해요. 그렇지만 도시와는 조금 다른 관성이 있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양보하고 타협할 줄 알아야 해요. 물론 이게 문제가 심하다는 부분에서는 좀 깨뜨려야 되는 부분도 있죠. 그 균형점을 잘 찾아야 하는데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서 한 노선만 취한다면 생활이 되게 만족스럽지는 못할 것 같아요. 살다 보면 때로는 왜 이러지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하는데, 어떤 이유로 그렇게 했나 보다 라고 유연하게 생각해야 하는 부분도 있고, ‘이거는 조금 바꿔봐야겠다!’ 싶은 부분은 좀 과감히 나서볼 필요도 있어요. 인터넷에 있는 안 좋은 이야기와 자극적인 부분만 바라보지 않고 잘 알아보고 온다면 굉장히 대안적이고 만족스러운 삶이 될 겁니다. 저도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왔지만 잘 융화되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즐겁게 살고 있어요. 뭐든 하기 나름인 것 같아요.
자, 마지막으로 다음 릴레이 인터뷰이를 추천해주신다면요?
제가 아까 말했듯이 처음 가르쳤던 학생이 지금 이제 20살, 21살이 됐어요. 아직 여기 살면서 대학에 다니는 친구도 있는데 그 친구를 소개해 주고 싶어요. 아무래도 이 인터뷰는 귀촌한 사람들이 많이 참여할 것 같아요. 근데 나고 자란 청년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면 좋을 것 같아 그 친구를 추천하고 싶어요. 이름도 우리 지역과 잘 어울리는 ‘풀잎’입니다. 제가 지금 가르치고 있는 학생의 누나이기도 해요.
학교 아이들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는 다정한 선생님이자, 왁자지껄한 친구들 이야기에 즐거워하는 청년 예준 씨의 앞으로의 곡성 생활이 무척 기대된다. 죽곡초등학교의 아이들이 자라서 기억하게 될 어린 날의 추억은 아마도 예준 씨 덕분에 행복했던 날들로 기억되지 않을까? 작은 시골 학교를 누구보다 큰 사랑으로 지키는 예준 씨의 마음이 따뜻하게 전해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