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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인터뷰 #6

이 가족이 곡성을 사랑하는 법

: 토란 디저트 전문카페 <가랑드> 이야기

에디터 제소윤

포토그래퍼 송광호


전국 토란 생산량의 75%가 곡성에서 난다. 물을 좋아하는 작물이라 섬진강과 보성강이 흐르는 곡성의 지형 조건이 토란을 생육하기에 알맞기 때문이란다. 그렇지만 토란도, 곡성도, 익숙한 이에게는 친근한 이름이지만 낯선 이에게는 ‘외지인’과 다름없다. 잠깐 소개를 해볼까. ‘땅속의 알’이라는 뜻의 토란(土卵)은 그 이름답게 동글동글한 알줄기를 맺는다. 꼭 감자처럼 생겼지만, 점액 성분이 있어 미끈미끈하고 쫄깃한 식감을 낸다. 예전에는 제사상에 국으로 많이 끓여냈지만, 식감에 대한 호불호가 강하다 보니 다양한 레시피를 찾아보기 어렵다.

<가랑드>를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이 토란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은 덜 수 있을 것 같다. 곡성으로 귀향하여 문화 해설사 활동을 하던 노계숙 씨가 곡성의 먹거리 관광 상품이 없다는 점에 착안해 2017년토란파이만주’를 처음 개발한 것이 <가랑드>의 시작이었다. 5명의 여성 농업인이 모여 토란파이만주를 생산 및 포장, 판매하는 1호점에 이어 7월, 두 명의 청년이 합류해 본격적으로 토란 디저트를 전문으로 하는 2호점을 열었다. 토란이라는 낯선 식자재로 맛있는 빵을 굽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빵을 통해 곡성을 알리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알기 위해 토란 디저트 전문카페 <가랑드>를 찾았다.

빵 굽는 딸의 아침

디저트를 담당하는 조은 씨를 만난 것은 카페 오픈보다 한두 시간 전인 이른 아침. 조리실에 가장 먼저 출근하여 반죽을 손질하고 빵을 구워낸다. 토란을 활용한 반죽은 이틀에 한 번 만들고, 그밖에 필요한 야채들은 미리미리 손질해 둔다.

(우) 토란 에그타르트. 마치 계란 노른자처럼 보이는 것은 토란당절임으로 만든 토란앙금이다. 토란을 24시간 동안 당에 절여두면 두고두고 ‘만능소스'처럼 사용할 수 있는 토란당절임이 된다. 가랑드에서는 이 당절임을 다양하게 활용하여 토란 디저트를 구워낸다. 

토란국을 제외하고 토란을 이용한 음식은 가랑드에서 처음 먹어보았어요. 빵과 잘 어울리는 재료인가요? 
토란은 끈적끈적하고, 무맛이고 냄새도 없어요. 단점이기도 하지만, 토란을 다른 재료와 사용했을 때는 다른 원재료의 깊은 맛을 끌어내요. 혹시 토란 밀크티 드셔 보셨어요? 일반 홍차의 가벼움을 토란이 잡아줘요. 풍미를 더한다고 할까요.

키슈, 타르트, 스콘 등 다양한 디저트에 토란을 얹어 구워내고 있어요. 레시피를 개발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나요?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조리를 시작했고, 대기업의 외식사업부와 제과제빵 브랜드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이 업계에서 일해왔어요. 그러다 보니 사실 여러 가지 레시피를 이미 가지고 있고, 이걸 활용해서 조합만 하면 됐죠. 메뉴 개발은 한 달 정도 투자했어요. 지금도 계속 보완하는 중이고요.

사람들의 반응은 어때요? 
다들 좋아하세요. 토란으로 만든 빵이라고 하면 생경하지만, 먹어보면 맛있거든요.

디저트를 만드는 건 모두 조은 씨의 몫인가요? 
네. 8시쯤 출근해서 빵 반죽하고 구워요. 파이만주를 제외한 디저트는 모두 여기서 만들어요. 파이만주는 1호점에서 만들고 포장까지 해서 이쪽으로 넘어오고요. 당일 판매, 당일 생산이 원칙이다 보니 매일 굽고 있어요.

재료를 모두 곡성에서 난 농산물로 준비하신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가랑드를 운영하는 주체는 여성 농업인 5명이 모여서 만든 수상한영농조합법인이에요. 조합원 중에 토란 농가도 있고, 블루베리 농가도 있어서 가져올 수 있는 거죠. 함께 하는 농가의 숫자도 점점 늘려가려고 해요. 냉동 야채나 수입산 야채도 사용해보긴 했는데, 그건 가랑드의 취지랑 맞지 않는 것 같았어요.

가게를 운영하면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요? 
요리하는 사람이다 보니 무조건 맛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거기다가 곡성의 대표 식품인 토란이 들어가니 더욱더 맛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죠. 제가 제품에 주로 신경을 쓰다 보니, 실질적으로 카페를 운영하는 것은 김빛나 대표의 몫이에요. 지원사업에 필요한 서류 처리나 매장 관리 등을 맡아서 해주니 저는 여기에 집중할 수 있죠.

김빛나 대표와는 사실 올케와 시누이로 만난 사이기도 해요. 어떻게 보면 편한 사이는 아닐 것 같은데, 두 사람이 함께 일하는 것은 어때요?
친구 같기도 하고, 가족이기도 하고. 서로 이루려고 하는 것이 있으니 그걸 최대한 존중하려 해요. 내가 생각하는 의도와 다르면 얘기를 해서 풀고. 이렇게 같이 가면 되는 거니까, 어려운 관계는 아니에요.

1호점은 토란파이만주를 통해 많이 알려졌고, 방송 매체에도 여러 번 소개됐어요. 이런 유명세가 2호점을 알리는 데 유리할 것 같기도 하고, 걱정되는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그 덕을 진짜 많이 보죠. 그렇지만 엄마 덕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는 소리를 듣기는 싫으니까, 그래서 더 열심히 한 것 같아요. 그런 말은 사실 쉽게 하기 쉬운 말이니까요.

기존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색깔을 유지하되, 2호점만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구축해가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2호점은 청년들이 만들어나가는 곳이라는 전제가 깔려있기는 했어요. 그렇지만 처음 가랑드를 만든 사람들이 구축해 놓은 것을 함부로 훼손할 수는 없잖아요. 최대한 기존 브랜드의 색을 유지하되 우리의 뭔가를 보여줘야 하고, 그러다 보니까 시작이 쉽지 않았어요. 기존의 것과 아예 다르게 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곧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죠.

1호점의 주력 상품인 토란파이만주는 관광 상품으로 개발됐어요. 그럼 2호점인 디저트 카페의 주요 고객층은 누구인가요?
가장 중요한 타깃은 지역 주민이에요. 관광객들을 위한 카페는 사실 많아요.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섬진강에서 보낸 시간으로 여기까지 왔다

오븐에서 빵이 노릇하게 익고, 갓 구운 빵을 진열대에 놓으니 본격적으로 카페의 하루가 시작된다. 바쁜 하루를 잠시 쪼개어 노계숙 씨와 이조은 씨가 한자리에 앉았다.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엄마와 딸이자, 함께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파트너로 함께 앉은 두 사람에게 가랑드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유지해 나갈 수 있는 마음가짐에 관해 물었다.

고향이 곡성이고, 몇 년 전에 다시 귀향하셨다고 들었어요. 어떤 계기를 통해 돌아오게 됐나요?
계숙 저는 오지리가 친정이에요. 광주에서 부동산 하면서 곡성을 자주 왔다 갔다 했는데, 기차마을을 지날 때마다 차들이 정말 많이 주차되어 있어요. 근데 이 사람들이 입장료 3천 원 말고도 곡성에 지갑을 열어놓고 가느냐, 그게 너무 궁금했었어요. 그러다가 하던 부동산을 정리하게 돼서, 쉰다섯에 귀촌을 결심하게 된 거예요. 귀촌은 내가 서른 후반부터 세웠던 계획이었어요. 시골로 온다고 생각하니까, 시간은 많으니 공부를 시작했어.

귀촌에 대해 충분히 준비하셨던 거네요.
계숙 사회복지도 공부하고, 보육교사 공부도 하고, 조경도 배우고, 아무튼 많이 배웠어요. 그러다 어느 날 해설사 선생님 한 분을 만나게 된 거예요. 그분이 ‘노 선생, 노 선생한테 해설사 일이 너무 잘 맞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전 ‘선생님, 저는 시골 가면 놀 거에요.’ 했어요. 근데 자꾸만 좋을 거라며, 한 달 열흘만 일한대. 그래서 해설사 공부를 시작했어요. 2015년 1월 1일부터 정식 해설사가 됐는데, 알게 된 거야. 그 기차마을 주차장 차들이 입장료만 내고 갔던걸.

그때는 곡성 여행을 기념할 만한 기념품이나 먹거리가 없었나 봐요. 
계숙 하다못해 그 당시에는 식당이나 카페도 지금처럼 없었어요. 해설사 활동을 하다 보니 이게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누군가는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지리산 관광아카데미를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상품 개발을 시작하게 된 거죠.

조은 씨는 엄마가 갑자기 빵을 만들기로 했을 때, 가족으로 그 선택에 공감하셨나요? 
조은 아뇨, 전혀 못 했어요. 딸 아들 다 키워놓고 좀 편안하게 사셨으면 좋겠는데, 여기 와서 또 일을 벌이고 계시는 게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같이 일하게 되면서 조금씩 이해해가고 있어요.

문화해설사뿐만 아니라 가랑드 역시 적극적으로 곡성을 알리려는 활동이잖아요. 곡성을 아끼고, 남들에게 자꾸 소개하고 싶은 원동력이 무엇일까요?
계숙 첫 시작은 사실 원망의 감정이에요(웃음). 저는 5남매 사이에서 자랐는데 당시 부모님이 오빠는 대학을 보내려 하고, 저는 대학을 못 가게 했어요. 부모님 몰래 원서를 넣었는데 면접보러 갈 방법이 없는 거예요. 차비를 빌리고 길을 물어물어 겨우 광주까지 갔는데 눈앞에서 교문이 닫혀버렸어요. 그러니 집으로 가고 싶겠어요? 섬진강 뿅뿅다리 있는 쪽으로 가서 자정이 넘도록 혼자 있었어요. 그러다 아무 말 않고 집에 들어가니 가족들은 대강 잠적한 이유를 알았고, 누구도 나한테 말을 못 걸어. 아랫목에 보름을 누워 있다가, 사촌을 따라 서울로 갔어요. 집이랑은 끝이라고 생각했죠.

그런 기억 때문에 끝이라고 생각했는데도, 곡성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계숙 그때 섬진강에서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어마어마하게 했어요. 애꿎은 돌멩이나 던지면서. 그래도 만약 도시 어딘가에서 내가 방황했다면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없을 거예요. 그 기억 때문에 곡성을 사랑하고, 애착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 조합원 중에서도 떠난 사람들은 다들 ‘저는 대표님만큼 곡성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래서 힘들 때 견딜 수가 없어요.’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섬진강이 나를 붙잡아줬다 싶어요. 애착이 가요.

조은 씨와는 어떻게 함께 일하게 됐나요?
계숙 지원사업을 받아 2호점을 하기로 계약했는데 담당 직원이 그만두게 됐어요. 그래서 빈자리를 채울 사람이 필요하게 된 거예요. 그때 빛나 대표에게 체험 카페를 해보지 않을래, 먼저 제안을 했어요. 이 친구가 체험 공방을 운영하면서 교사로 활동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빛나와 체험 카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메뉴도 개발했는데, 올해 들어서 코로나가 터진 거죠. 이 친구(조은)는 그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절대 안 한다고 했었어요. 그때 마침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 기간이었으니, ‘아야, 엄마가 애기를 봐줄게. 항상은 아니지만 빈자리를 채워줄게’하고 설득했죠.
조은 아들 덕분에 여기 와 있어요(웃음).
계숙 엄마가 애기는 잘 보잖아?
조은 어느 정도는? (웃음) 아무래도 가족 손에서 자라는 게 좋으니까.

가족과 함께 일하는 것은 힘들지 않나요? 
계숙 일하는 건 철저히 분리되어 있어요. 사실 2호점 개점을 준비하면서 정식 개점일이 많이 미뤄지게 됐어요. 제 성격 같으면 진작 개입했을 텐데, 기다렸죠.

걱정되지 않으셨어요? 이미 1호점에서 이뤄놓은 것이 있는데,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을 거 같아요. 
계숙 당연히 걱정됐죠. 애가 얼마나 탔겠어요. 그렇지만 시작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아요.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요. 그 시작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참 잘 기다렸어요. 만약 잘못돼서 다시 시작해야 해도 그땐 쉬울 거예요. 또 엄마가 여기에 얼마나 애정을 갖고 열정을 쏟아붓는지 아니까, 아마 잘할 거예요.
조은 그래서 더 늦어지더라도 우리 손으로 하고 싶었어요. 아까도 얘기했던 것처럼 1호점의 것을 가져오면서 우리만의 2호점을 만드는 게 제일 어려웠거든요. 우리만의 것을 다지는 기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 매장에 대한 애정은 엄마 못지않은 거죠.
계숙 얘들도 냉정해요. 제가 조금씩 농사를 짓는데, 매장 옆에 수레를 갖다 놓고 남는 농산물을 나눔하고 싶은 생각이 늘 있었어요. 필요한 사람은 가져가고, 또 가져가는 사람은 자기 집 농산물을 다시 갖다 놓기도 하고. 1호점 쪽은 사람 통행이 많지 않아서, 여기에 수레를 놓고 해봤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꺼냈는데 단칼에.
조은 안 돼요. 제대로 관리하는 모습을 보여줘야죠(웃음).

모녀 사이에서 인터뷰하는 게 쉽지 않네요(웃음). 저도 저와 제 엄마 사이를 자꾸 떠올리며 인터뷰를 하게 돼요. 지금은 서로 다른 컨셉과 목표를 두고 분리하여 두 매장을 운영하고 있지만, 함께 이루고 싶은 공동의 목표도 있을까요? 
조은 이건 가랑드를 운영하는 주체인 수상한영농조합법인의 목표가 될 것 같아요. 법인은 몸통이고, 그 안에 브랜드를 하나둘씩 파생해나가는 거죠. 곡성에는 토란뿐만 아니라 딸기, 멜론, 옥수수 같은 농산물이 많이 나잖아요. 그런 농산물들을 활용해서 뭔가를 해보고 싶어요. 최종 목표는 곡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잘 먹고 잘사는 거에요.
계숙 그동안의 목표는 뭐를 이루고, 뭐를 확장하고, 그런 거였어요. 그걸 반드시 이뤄야 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까지 달려오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빴는데, 애들한테까지 그렇게 숨 가쁘게 달려가라고는 하고 싶지 않아요. 어쨌든 행복한 일터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돈은 벌어야죠(웃음).

“가랑드는 경험을 통해 곡성을 알립니다”라는 슬로건이 인상 깊어요. 두 분이 곡성에서 경험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조은 곡성군에 거주하는 청년들을 만나고 싶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움직임이 될지 모르겠지만 하나의 채널을 만들어서 운영해보고 싶어요. 저마다 여기 와서 이루고 싶은 게 있을 텐데, 혼자 하면 힘들어도 같이 하면 할 수 있잖아요.
계숙 이곳을 통해서 젊은 친구들은 젊은 친구들대로, 사람들이 관계를 맺어나가면 좋겠어요. 그렇게 해서 행복해지고 편안해질 수 있다면 참 좋겠어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가랑드를 자유롭게 오픈하고, 각자 먹을 것들 싸 와서,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 없이 나눌 수 있게. 그런 기회를 제공하고 싶어요.


지금 내가 살아가는 곳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 도시든, 시골이든 살아가는 곳에 마음 붙이는 일은 참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계숙 대표의 섬진강 이야기를 들으며,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 사람들이 한강에 정 붙이는 것도, 그 물결을 바라보며 친구들과 맥주 한 잔 기울이며 수다 떨던 기억이 있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 곡성에서 만난 사람들과 무언가를 나누며 살아갈 때, 비로소 어느 아름다운 풍경에 뿌리내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 함께 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디저트 한 입 나눠 물면 그보다 더한 행복도 아마 없을 것이다. 이 가족이 곡성을 사랑하는 방법처럼.

전국 토란 생산량의 75%가 곡성에서 난다. 물을 좋아하는 작물이라 섬진강과 보성강이 흐르는 곡성의 지형 조건이 토란을 생육하기에 알맞기 때문이란다. 그렇지만 토란도, 곡성도, 익숙한 이에게는 친근한 이름이지만 낯선 이에게는 ‘외지인’과 다름없다. 잠깐 소개를 해볼까. ‘땅속의 알’이라는 뜻의 토란(土卵)은 그 이름답게 동글동글한 알줄기를 맺는다. 꼭 감자처럼 생겼지만, 점액 성분이 있어 미끈미끈하고 쫄깃한 식감을 낸다. 예전에는 제사상에 국으로 많이 끓여냈지만, 식감에 대한 호불호가 강하다 보니 다양한 레시피를 찾아보기 어렵다.


<가랑드>를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이 토란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은 덜 수 있을 것 같다. 곡성으로 귀향하여 문화 해설사 활동을 하던 노계숙 씨가 곡성의 먹거리 관광 상품이 없다는 점에 착안해 2017년 ‘토란파이만주’를 처음 개발한 것이 <가랑드>의 시작이었다. 5명의 여성 농업인이 모여 토란파이만주를 생산 및 포장, 판매하는 1호점에 이어 7월, 두 명의 청년이 합류해 본격적으로 토란 디저트를 전문으로 하는 2호점을 열었다. 토란이라는 낯선 식자재로 맛있는 빵을 굽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빵을 통해 곡성을 알리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알기 위해 토란 디저트 전문카페 <가랑드>를 찾았다. 



빵 굽는 딸의 아침

디저트를 담당하는 조은 씨를 만난 것은 카페 오픈보다 한두 시간 전인 이른 아침. 조리실에 가장 먼저 출근하여 반죽을 손질하고 빵을 구워낸다. 토란을 활용한 반죽은 이틀에 한 번 만들고, 그밖에 필요한 야채들은 미리미리 손질해 둔다.

(우) 토란 에그타르트. 마치 계란 노른자처럼 보이는 것은 토란당절임으로 만든 토란앙금이다. 토란을 24시간 동안 당에 절여두면 두고두고 '만능소스'처럼 사용할 수 있는 토란당절임이 된다. 가랑드에서는 이 당절임을 다양하게 활용하여 토란 디저트를 구워낸다. 

토란국을 제외하고 토란을 이용한 음식은 가랑드에서 처음 먹어보았어요. 빵과도 잘 어울리는 재료인가요? 
토란은 끈적끈적하고, 무맛이고 냄새도 없어요. 단점이기도 하지만, 토란을 다른 재료와 사용했을 때는 다른 원재료의 깊은 맛을 끌어내요. 혹시 토란 밀크티 드셔 보셨어요? 일반 홍차의 가벼움을 토란이 잡아줘요. 풍미를 더한다고 할까요.


키슈, 타르트, 스콘 등 다양한 디저트에 토란을 얹어 구워내고 있어요. 레시피를 개발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나요?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조리를 시작했고, 대기업의 외식사업부와 제과제빵 브랜드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이 업계에서 일해왔어요. 그러다 보니 사실 여러 가지 레시피를 이미 가지고 있고, 이걸 활용해서 조합만 하면 됐죠. 메뉴 개발은 한 달 정도 투자했어요. 지금도 계속 보완하는 중이고요.


사람들의 반응은 어때요?
다들 좋아하세요. 토란으로 만든 빵이라고 하면 생경하지만, 먹어보면 맛있거든요.



디저트를 만드는 건 모두 조은 씨의 몫인가요?
네. 8시쯤 출근해서 빵 반죽하고 구워요. 파이만주를 제외한 디저트는 모두 여기서 만들어요. 파이만주는 1호점에서 만들고 포장까지 해서 이쪽으로 넘어오고요. 당일 판매, 당일 생산이 원칙이다 보니 매일 굽고 있어요.


재료를 모두 곡성에서 난 농산물로 준비하신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가랑드를 운영하는 주체는 여성 농업인 5명이 모여서 만든 수상한영농조합법인이에요. 조합원 중에 토란 농가도 있고, 블루베리 농가도 있어서 가져올 수 있는 거죠. 함께 하는 농가의 숫자도 점점 늘려가려고 해요. 냉동 야채나 수입산 야채도 사용해보긴 했는데, 그건 가랑드의 취지랑 맞지 않는 것 같았어요.


가게를 운영하면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요?
요리하는 사람이다 보니 무조건 맛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거기다가 곡성의 대표 식품인 토란이 들어가니 더욱더 맛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죠. 제가 제품에 주로 신경을 쓰다 보니, 실질적으로 카페를 운영하는 것은 김빛나 대표의 몫이에요. 지원사업에 필요한 서류 처리나 매장 관리 등을 맡아서 해주니 저는 여기에 집중할 수 있죠.


김빛나 대표와는 사실 올케와 시누이로 만난 사이기도 해요. 어떻게 보면 편한 사이는 아닐 것 같은데, 두 사람이 함께 일하는 것은 어때요?
친구 같기도 하고, 가족이기도 하고, 서로 이루려고 하는 것이 있으니 그걸 최대한 존중하려 해요. 내가 생각하는 의도와 다르면 얘기를 해서 풀고, 이렇게 같이 가면 되는 거니까, 어려운 관계는 아니에요.


1호점은 토란파이만주를 통해 많이 알려졌고, 방송 매체에도 여러 번 소개됐어요. 이런 유명세가 2호점을 알리는 데 유리할 것 같기도 하고, 걱정되는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그 덕을 진짜 많이 보죠. 그렇지만 엄마 덕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는 소리를 듣기는 싫으니까, 그래서 더 열심히 한 것 같아요. 그런 말은 사실 쉽게 하기 쉬운 말이니까요.

기존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색깔을 유지하되, 2호점만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구축해가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2호점은 청년들이 만들어나가는 곳이라는 전제가 깔려있기는 했어요. 그렇지만 처음 가랑드를 만든 사람들이 구축해 놓은 것을 함부로 훼손할 수는 없잖아요. 최대한 기존 브랜드의 색을 유지하되 우리의 뭔가를 보여줘야 하고, 그러다 보니까 시작이 쉽지 않았어요. 기존의 것과 아예 다르게 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곧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죠.

1호점의 주력 상품인 토란파이만주는 관광 상품으로 개발됐어요. 그럼 2호점인 디저트 카페의 주요 고객층은 누구인가요?
가장 중요한 타깃은 지역 주민이에요. 관광객들을 위한 카페는 사실 많아요.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섬진강에서 보낸 시간으로 여기까지 왔다

오븐에서 빵이 노릇하게 익고, 갓 구운 빵을 진열대에 놓으니 본격적으로 카페의 하루가 시작된다. 바쁜 하루를 잠시 쪼개어 노계숙 씨와 이조은 씨가 한자리에 앉았다.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엄마와 딸이자, 함께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파트너로 함께 앉은 두 사람에게 가랑드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유지해 나갈 수 있는 마음가짐에 관해 물었다.


고향이 곡성이고, 몇 년 전에 다시 귀향하셨다고 들었어요. 어떤 계기를 통해 돌아오게 됐나요?
계숙 저는 오지리가 친정이에요. 광주에서 부동산 하면서 곡성을 자주 왔다 갔다 했는데, 기차마을을 지날 때마다 차들이 정말 많이 주차되어 있어요. 근데 이 사람들이 입장료 3천 원 말고도 곡성에 지갑을 열어놓고 가느냐, 그게 너무 궁금했었어요. 그러다가 하던 부동산을 정리하게 돼서, 쉰다섯에 귀촌을 결심하게 된 거예요. 귀촌은 내가 서른 후반부터 세웠던 계획이었어요. 시골로 온다고 생각하니까, 시간은 많으니 공부를 시작했어.

귀촌에 대해 충분히 준비하셨던 거네요.
계숙 사회복지도 공부하고, 보육교사 공부도 하고, 조경도 배우고, 아무튼 많이 배웠어요. 그러다 어느 날 해설사 선생님 한 분을 만나게 된 거예요. 그분이 ‘노 선생, 노 선생한테 해설사 일이 너무 잘 맞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전 ‘선생님, 저는 시골 가면 놀 거에요.’ 했어요. 근데 자꾸만 좋을 거라며, 한 달 열흘만 일한대. 그래서 해설사 공부를 시작했어요. 2015년 1월 1일부터 정식 해설사가 됐는데, 알게 된 거야. 그 기차마을 주차장 차들이 입장료만 내고 갔던걸.

그때는 곡성 여행을 기념할 만한 기념품이나 먹거리가 없었나 봐요. 
계숙 하다못해 그 당시에는 식당이나 카페도 지금처럼 없었어요. 해설사 활동을 하다 보니 이게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누군가는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지리산 관광아카데미를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상품 개발을 시작하게 된 거죠.

조은 씨는 엄마가 갑자기 빵을 만들기로 했을 때, 가족으로서 그 선택에 공감하셨나요? 
조은 아뇨, 전혀 못 했어요. 딸 아들 다 키워놓고 좀 편안하게 사셨으면 좋겠는데, 여기 와서 또 일을 벌이고 계시는 게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같이 일하게 되면서 조금씩 이해해가고 있어요.

문화해설사뿐만 아니라 가랑드 역시 적극적으로 곡성을 알리려는 활동이잖아요. 곡성을 아끼고, 남들에게 자꾸 소개하고 싶은 원동력이 무엇일까요?
계숙 첫 시작은 사실 원망의 감정이에요(웃음). 저는 5남매 사이에서 자랐는데 당시 부모님이 오빠는 대학을 보내려 하고, 저는 대학을 못 가게 했어요. 부모님 몰래 원서를 넣었는데 면접보러 갈 방법이 없는 거예요. 차비를 빌리고 길을 물어물어 겨우 광주까지 갔는데 눈앞에서 교문이 닫혀버렸어요. 그러니 집으로 가고 싶겠어요? 섬진강 뿅뿅다리 있는 쪽으로 가서 자정이 넘도록 혼자 있었어요. 그러다 아무 말 않고 집에 들어가니 가족들은 대강 잠적한 이유를 알았고, 누구도 나한테 말을 못 걸어. 아랫목에 보름을 누워 있다가, 사촌을 따라 서울로 갔어요. 집이랑은 끝이라고 생각했죠.

그런 기억 때문에 끝이라고 생각했는데도, 곡성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계숙 그때 섬진강에서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어마어마하게 했어요. 애꿎은 돌멩이나 던지면서. 그래도 만약 도시 어딘가에서 내가 방황했다면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없을 거예요. 그 기억 때문에 곡성을 사랑하고, 애착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 조합원 중에서도 떠난 사람들은 다들 ‘저는 대표님만큼 곡성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래서 힘들 때 견딜 수가 없어요’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섬진강이 나를 붙잡아줬다 싶어요. 애착이 가요.

조은 씨와는 어떻게 함께 일하게 됐나요?
계숙 지원사업을 받아 2호점을 하기로 계약했는데 담당 직원이 그만두게 됐어요. 그래서 빈자리를 채울 사람이 필요하게 된 거예요. 그때 빛나 대표에게 체험 카페를 해보지 않을래, 먼저 제안을 했어요. 이 친구가 체험 공방을 운영하면서 교사로 활동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빛나와 체험 카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메뉴도 개발했는데, 올해 들어서 코로나가 터진 거죠. 이 친구(조은)는 그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절대 안 한다고 했었어요. 그때 마침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 기간이었으니, ‘아야, 엄마가 애기를 봐줄게. 항상은 아니지만 빈자리를 채워줄게’하고 설득했죠.
조은 아들 덕분에 여기 와 있어요(웃음).
계숙 엄마가 애기는 잘 보잖아?
조은 어느 정도는? (웃음) 아무래도 가족 손에서 자라는 게 좋으니까.

가족과 함께 일하는 것은 힘들지 않나요? 
계숙 일하는 건 철저히 분리되어 있어요. 사실 2호점 개점을 준비하면서 정식 개점일이 많이 미뤄지게 됐어요. 제 성격 같으면 진작 개입했을 텐데, 기다렸죠.

걱정되지 않으셨어요? 이미 1호점에서 이뤄놓은 것이 있는데,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을 거 같아요. 
계숙 당연히 걱정됐죠. 애가 얼마나 탔겠어요. 그렇지만 시작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아요.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요. 그 시작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참 잘 기다렸어요. 만약 잘못돼서 다시 시작해야 해도 그땐 쉬울 거예요. 또 엄마가 여기에 얼마나 애정을 갖고 열정을 쏟아붓는지 아니까, 아마 잘할 거예요.
조은 그래서 더 늦어지더라도 우리 손으로 하고 싶었어요. 아까도 얘기했던 것처럼 1호점의 것을 가져오면서 우리만의 2호점을 만드는 게 제일 어려웠거든요. 우리만의 것을 다지는 기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 매장에 대한 애정은 엄마 못지않은 거죠.
계숙 얘들도 냉정해요. 제가 조금씩 농사를 짓는데, 매장 옆에 수레를 갖다 놓고 남는 농산물을 나눔하고 싶은 생각이 늘 있었어요. 필요한 사람은 가져가고, 또 가져가는 사람은 자기 집 농산물을 다시 갖다 놓기도 하고. 1호점 쪽은 사람 통행이 많지 않아서, 여기에 수레를 놓고 해봤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꺼냈는데 단칼에.
조은 안 돼요. 제대로 관리하는 모습을 보여줘야죠(웃음).

모녀 사이에서 인터뷰하는 게 쉽지 않네요(웃음). 저도 저와 제 엄마 사이를 자꾸 떠올리며 인터뷰를 하게 돼요. 지금은 서로 다른 컨셉과 목표를 두고 분리하여 두 매장을 운영하고 있지만, 함께 이루고 싶은 공동의 목표도 있을까요? 
조은 이건 가랑드를 운영하는 주체인 수상한영농조합법인의 목표가 될 것 같아요. 법인은 몸통이고, 그 안에 브랜드를 하나둘씩 파생해나가는 거죠. 곡성에는 토란뿐만 아니라 딸기, 멜론, 옥수수 같은 농산물이 많이 나잖아요. 그런 농산물들을 활용해서 뭔가를 해보고 싶어요. 최종 목표는 곡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잘 먹고 잘사는 거에요.
계숙 그동안의 목표는 뭐를 이루고, 뭐를 확장하고, 그런 거였어요. 그걸 반드시 이뤄야 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까지 달려오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빴는데, 애들한테까지 그렇게 숨 가쁘게 달려가라고는 하고 싶지 않아요. 어쨌든 행복한 일터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돈은 벌어야죠(웃음).

“가랑드는 경험을 통해 곡성을 알립니다”라는 슬로건이 인상 깊어요. 두 분이 곡성에서 경험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조은 곡성군에 거주하는 청년들을 만나고 싶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움직임이 될지 모르겠지만 하나의 채널을 만들어서 운영해보고 싶어요. 저마다 여기 와서 이루고 싶은 게 있을 텐데, 혼자 하면 힘들어도 같이 하면 할 수 있잖아요.
계숙 이곳을 통해서 젊은 친구들은 젊은 친구들대로, 사람들이 관계를 맺어나가면 좋겠어요. 그렇게 해서 행복해지고 편안해질 수 있다면 참 좋겠어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가랑드를 자유롭게 오픈하고, 각자 먹을 것들 싸 와서,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 없이 나눌 수 있게. 그런 기회를 제공하고 싶어요.


지금 내가 살아가는 곳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 도시든, 시골이든 살아가는 곳에 마음 붙이는 일은 참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계숙 대표의 섬진강 이야기를 들으며,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 사람들이 한강에 정 붙이는 것도, 그 물결을 바라보며 친구들과 맥주 한 잔 기울이며 수다 떨던 기억이 있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 곡성에서 만난 사람들과 무언가를 나누며 살아갈 때, 비로소 어느 아름다운 풍경에 뿌리내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 함께 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디저트 한 입 나눠 물면 그보다 더한 행복도 아마 없을 것이다. 이 가족이 곡성을 사랑하는 방법처럼.